우연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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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야 할걸 못 한 나한테 화가 났어. 내가 하지 못한 말.네가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난 시부야 중심가에 있었어. 하마사키 아유미의 노래가 흘렀고 유행 차림 소녀들 이 시끄럽게 떠들었어.하지만 네 목소리는 아주 또렷이 들렸어.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어. 혼자 힘든 시간을 견디다 전화했다는 게 느껴 졌어.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 뭔가 말하면 너를 더 힘들게 할 것만 같았어. 그래서 전화를 끊었고 다시는 걸지 않았어.”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방치된 블로그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한다. 갑작스레 단절된 이야기는 여느 식물처럼 빛나는 재생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말하려다 만 것을 듣고 있을 때처럼 찝찝해서 적당한 결말로 게워내고 싶지만 도무지 지워지지 않고 떼워지지 않을 뿐이다. “그는 한 인간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세심한 완벽함을 가지고 그를 꿈꿔 현실 속에 내놓고 싶었다.(보르헤스)” 이야기의 폐허는 꿈꿨지만 실패한 꿈의 환영이고, 이해하려 했지만 이해 받지 못한 존재의 애수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엉켜서 나눠지지 않고 파편화되어 맴돌기만 한다.

“그때 내가 못 한 말은 난 너만을 사랑했다는 것. 넌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을 수 있지만 난 네가 아니면 안 돼. 나와 함께 하면 네 인생이 복잡해질 수 있지만 그래 도 날 선택해 줬으면 좋겠다고.그 말을 못 했어. 하지만 지금 난 너에게 뭘 원해서 온 게 아니야.”

히마구치 류스케가 연출한 <우연과 상상>은 세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다. 절친한 친구가 푹 빠진 사람이 2년 전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이야기를 담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앙금을 품고서 자신을 낙제시킨 대학교수를 찾아가는 내용의 ‘문은 열어둔 채로’, 의문의 바이러스로 전산기술이 멈춘 세계에서 레즈비언 여성이 헤어진 동창에게 찾아가는 내용의 ‘다시 한번’. 이 세가지 이야기는 아무도 연결될 수 없는 인물들 같지만 태초의 가능성을 품고서 움직이는 꿈이라는 관념을 살아움직이는 불꽃처럼 구현하다가 우연의 바람대로 쉽게 꺼지는 순간을 담는다. ‘다시 한번’의 대사처럼 그들을 엮는 것은 그런 구멍들이다.

“단지 그때 그 말을 못 했다고 전하고 싶었어. 널 힘들게 하더라도 말했어야 했어. 그 고통이 우리 인생에 필요하단 걸 깨달았거든. 지금 네 인생에도 조금은 나와 같은 구멍이 생겼을 테니까.”

트라우마적인 환경은 인간에 스키마라는 상흔을 남긴다. 상흔의 불길에 휩싸인 인간의 마음은 더이상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할 힘보다 상황을 트라우마적인 반응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자동화 기계와 다를 바 없어진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본성만큼은 사라지지 않고서 노스텔지아를 만드는데, 부정만 일삼는 뇌에서 어느 부정도 없는 일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적인 사건이다. 생존의 욕구만큼 강하고 질긴 이 이야기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은 시공간을 사무침으로 단색칠하다 보면 이 행위에 깃든 애도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어진다. 아무 트라우마도 잠식할 수 없었던 짧았던 평화,무탈, 행운은 결코 당연히 주어진 적 없음을.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뺨따귀를 때릴 순간만 기다리고 있음을.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상실과 부재와 결핍 같은 것보다 세상에는 더 낫고 멋지고 아름다운 게 있다고. 다시 연결될 수 있다고 믿고 적어 보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왔어.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분명 있을 거야. 이젠 그걸 채울 수 없지만 나에게도 그게 있단 걸 전하려고 왔어. 그 구멍을 통해 우린 지금도 연결돼 있을지도 몰라. 그걸 말하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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