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HOUR

지지적 관계를 형성하고 조직해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일이고 또 어떤 의미인가. 누군가와 가족이 되고 누군가의 가족을 만나다 보면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기 마련이고 한번도 되어보지 못한 것을 되어가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상상해보고 다른 누군가가 되어간다는 의미와 같다. 가끔은 긴 터널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빠져나왔을 때 훤히 비치는 햇살에 빛나는 다른 누군가를 꿈꿀만큼 어둡고 긴 터널.

“알아줬으면 해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도대체 누가 무엇을 알아주기 바라는지 모르겠어”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는 역행하는 열차가 터널을 갓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30대 후반 네명의 친구가 터널을 빠져나와 햇살이 비추어 서로를 다시 발견하며 미소 지을 때, 가장 행복했던 때의 기억은 열차의 역행처럼 영원히 재현되고 동시에 봉인된다. 5시간 18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어둡고 긴 터널에 갇혀 서로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못하는 어두컴컴함에 할애되는데, 스텝이 꼬여 알아채지도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인간의 무심함에 대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익숙했던 관계와 세상이 새삼 낯설게 느끼는 순간은 앞으로 나아간 이들만 느낄 수 있는 현재 감각이다. 우리가 탄 열차가 뒤로 나아가는지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 빛이 보여 다시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고통에 외로움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고 잠시 상상해볼 수 있다면 잠시 무릎 꿇고 기어도 괜찮은 일 아닐까.

현상을 유지하며 버티는 일이 언제나 괜찮은 선택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 만큼은 충분히 살았고, 충분히 잃었다. 하지만 내가 슬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슬픔이란 거대한 줄다리기이며 가끔은 자기가 원치 않는 쪽에 깃발이 꽂히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게임이 기쁨을 죄다 소진시키고, 무릎 꿇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설사 내가 슬프다고 해도, 내 손은 여전히 줄을 잡고 있다. 나는 줄을 잡고 있을 때, 설령 줄을 당기고 있진 않는다 해도,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삶은 너무 길다. 이 말이 클리셰이긴 해도, 사실이다. 너무 길고, 때론 너무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껏 무척 멀리까지 잘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고의 순간이, 어딘가의 모퉁이를 돌아, 여전히 나를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죽고 싶을 때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는 없다, 하닙 압두라킴)

우리가 이름 붙이고 언어를 지어다가 읽는 것은 자신을 읽는 일과 같다. 그러니까 읽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일단 이름 붙이고 불러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구술할 언어가 없거나 읽는 방법도 몰랐을 존재가 품었을 일말의 가능성과 서글픔을 상상해보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에게 이례적인 근사함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내 손은 여전히 줄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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